![중종 [역사만화] 박시백의 1](https://blog.kakaocdn.net/dn/bwV8ct/btrtJBy5MWk/XMvpgktVP6aUI2gPy984Uk/img.jpg)
출판사 책소개 ▶
조선왕조실록은 당대를 그린 유일한 정본기록인 만큼 한국 역사를 이해하는 첫걸음이자 한국 문화의 원천이 되는 유산이다. 하지만 300쪽짜리 책 4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때문에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박시백 화백이 방대한 기록을 만화화해 탄생시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국민 교양으로 자리 잡았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2021년 개정판으로 새롭게 오픈했다. 박시백 화백이 직접 그린 화보가 표지에 산뜻하게 들어 있어 실록마다 대표적인 인물들의 성격과 상황을 더욱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박시백 화백의 화보를 바탕으로 한 세련된 디자인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오랜 팬은 물론 아직 이 책을 접해 보지 못한 독자의 눈길을 끈다.
2021년 개정판은 한 권 한 권과 세트를 구분한 것이 큰 특징이다. 실록별로 읽고 싶은 독자는 검은 표지가 인상적인 블랙에디션(1권)에서 골라 읽을 수 있다. 또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전체를 단숨에 읽고 싶은 독자들은 블랙에디션보다 슬림한 판형과 강렬한 붉은색 표지의 레드에디션(특별세트)으로 즐길 수 있다. 특별세트는 2015년 개정판보다 더 싼 가격에 출간돼 전집을 원하는 독자에게 큰 이점이 된다.
2003년 출간된 이래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시대 변화에 발맞춰 우리의 소중한 역사기록인 실록을 보다 많은 독자와 함께 나누고 부모세대가 자녀세대에 우리 역사를 물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권 – 중종실록
![중종 [역사만화] 박시백의 2](https://blog.kakaocdn.net/dn/K3b7s/btrtRWv3DPs/MvwRDpguPsRhhGbC0s3sak/img.jpg)
![중종 [역사만화] 박시백의 3](https://blog.kakaocdn.net/dn/oPD26/btrtLUESsAM/KCrpE37oAwDWiVDVhF5AD0/img.jpg)
중종실록의 주인공은 중종이다.저자가 밝혔듯이 이 시리즈는 정치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조선은 유교 중심의 체제였으며 신권이 상대적으로 강하였다. 그러나 왕조사회인 이상 정치의 중심은 국왕이었다. 따라서 이 시리즈는 각 권마다 수록된 왕의 생애 동안 일어난 일들이 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중종실록』에서는 이상하게 왕·중종의 이미지가 희미했다. 중종의 치세에서 권력의 중점은 왕이 아니었다. 초기에는 공신들이 득세했고, 중기에는 저 유명한 조광조가 집권했으며, 후기에는 김안로가 악명을 떨쳤다.
연산군 재위기간 중종이 진성대군이었던 때. 왕이 되기 이전의 중종. 이때도 중종은 눈에 띄는 일이 없었다. 세조 이후 대군 및 왕자군은 능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함부로 나섰다가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제거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산군은 폭군 아닌가. 선왕의 후궁을 때려죽일 때 아들들에게 어머니를 때리라고 했던 폭군. 엄한 이복 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그때 취했던 자기보신이 너무나 반복되어 왕의 시대도 자연스럽게 이어졌을까? 연산군은 종친을 건드리지 않았다. 절대왕권을 구축했지만 그것은 폭력과 공포 위에 확립된 불안한 왕권에 불과하다.잠재적 위협인물로 보고 진성대군을 제거할 수도 있겠지만 연산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종 [역사만화] 박시백의 4](https://blog.kakaocdn.net/dn/zXFoC/btrtXsmWUBQ/cLRgKVknT4MHDJc19MJdc0/img.jpg)
중종은 반정으로 추대된 추대 자신이 주도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는 신하들의 옹립으로 왕이 되었다. 중종은 초반 공신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처럼 쫓겨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분명히 했을 것이다. 중종의 통치는 보신 또는 보신이었다. 그래도 그럴 기회가 있었다. 중종은 39년 재위하였다. 조선 역대 왕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길다. 자신들의 왕권을 강화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중종은 시도를 하고는 있다.공신 사후 중종은 개혁을 시도하는 의미에서 조광조를 등용하였다. 왕은 조광조를 무조건 신임하며 힘을 실어주었다.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맹위를 떨친 조광조의 세력. 그러나 정작 중종은 위협을 느낀다. 조광조의 세력을 자신이 제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무조건적인 신뢰를 준 때가 언제냐며 등을 돌린 왕은 비정하고 냉혹했다.
조광조의 사사는 왕의 결정이었다.조광조가 단순한 사리사욕을 탐하는 인물이 아님을 알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왕은 자신의 왕권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인물을 좌시하지 않았다. 중종은 조광조를 버리기로 결심한 뒤 단호하게 일을 진행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후 개혁은 중단된다. 이후 중종이 선택한 파트너 김안로는 사리사욕을 철저히 탐하는 권신이었다. 저자는 조광조의 죽음은 개혁의 실패이자 중종의 실패였다(p135)고 평했다.
![중종 [역사만화] 박시백의 5](https://blog.kakaocdn.net/dn/WM5PU/btrtLVqmK5K/CfXr1x3aiLwHEYS3E0VT31/img.jpg)
![중종 [역사만화] 박시백의 6](https://blog.kakaocdn.net/dn/lUvDE/btrtX1bCwaS/AVq607Jubj86uosfBXO0AK/img.jpg)
중종이 주안점을 둔 것은 기본적으로 왕권 유지였다.그는 이를 위해 신하 1명을 중임하고 국정운영의 동반자로 삼았다. 무모할 정도의 파워 상승과 갑작스러운 반격(p183)이 중종식 정치의 특징이다. 권력교체를 통해 신권이 왕권을 넘지 못하도록 한 조치는 좋은 선택일 것이다. 조광조가 이상적인 인물상으로 다가갔으나 왕은 겁에 질려 이내 처단해 버렸다. 조광조를 제외한 나머지 파트너들은 나라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이 중요한 소인들에 가까웠다.
![중종 [역사만화] 박시백의 7](https://blog.kakaocdn.net/dn/bo6OBJ/btrt1JuHofd/qUxZJQ5Dk6ZMx4bBKRwQv1/img.jpg)
왕권을 강화하기보다는 왕권을 유지하는 데 집착했던 중종. 권력 교체를 통해 왕권을 유지할 뿐 가장 필요한 개혁과 민생정치는 외면한 왕. 다만 성실했을 뿐 장단기 구상도 사물의 전후도, 일관된 원칙도, 책임성도 없었던 왕(p192)이었다.
중종은 조광조를 배신했듯이 부인과 아들 관계에서 아쉬운 구석이 있다.중종의 첫 부인은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 신씨다. 신수근의 누나는 연산군의 부인, 즉 중전이었다. 신수근은 누나와 딸을 형제에게 시집보낸 셈이다.
연산군이 폐위될 때 중전 신씨 모두 폐위되었다.신수근도 반정 당일 처단된다. 이후 중종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부인 신씨도 왕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신들은 신 씨를 몰아내자고 주장한다. 반역자 신수근의 딸인 그녀를 중전으로 취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종은 조강지처란 이유로 주저한다. 망설인 기간이 일주일이었다. 왕이 동의한 뒤 신씨는 폐적돼 쫓겨난다.
![중종 [역사만화] 박시백의 8](https://blog.kakaocdn.net/dn/b6RoKV/btrtOy9n3c9/HNInRiXJxVhbeZ1lA7PyDK/img.jpg)
아주머니와 조카가 나란히 폐비가 되었다. 그래서 실록에 폐비 신 씨는 2명이나 된다.
그동안 중종은 후궁들을 대거 배치하였다.새 왕비 장경왕후는 이 후궁들 가운데서 뽑힌 인물이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장경왕후 윤씨가 왕자를 낳고 죽자 조정에는 폐비 신씨를 불러들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반대할 가능성이 높은 반정공신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신 씨의 복위는 문제없다.
그러나 중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치마바위 전설이 남아 있듯이 야사에서는 중종과 폐비 신씨가 평생을 그리워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야사일 뿐 사실이 아닌 중종은 폐비를 불러들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경왕후의 장제가 끝나기 전에 새 결혼식을 올리려 하였다(p131)고 한다. 중종 사후 사관이 부부간의 정이 없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간택령에 들어온 새 왕비의 나이는 17세.그가 바로 문정왕후였다.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이자 명종의 대비. 만약 신 씨가 복위했다면 악명을 떨친 문정왕후는 없었을 것이다. 인종이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고 중종이 정치적 문제를 고려해 신씨의 복위를 거부하고 새 왕비를 영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장경왕후가 사망했을 때 신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궁궐에서 불려갈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일까. 호시자와령이 내린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했을까. 신 씨는 중종이 죽은 뒤에도 13년을 더 살았다. 나중에 영조 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로 불리지만, 이미 그녀가 죽은 지 오래되었다.단경왕후는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와 같이 본인에게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폐위되었다(연산군부인 폐비 신씨도 같은 입장이기는 하다). 시대 논리에 따라 희생된 여인들 단경왕후는 중종을 그리워했을까? 혹시 무심한 지아비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조선사에서 친아들을 직접 죽인 왕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역사적 사례다. 그런데 선례가 있었다. 중종은 경빈 박씨의 친자이자 서장자인 복성군에게 사사케 한(인조가 소현세자 독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으나 공식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아내와 아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후세의 비난을 받고 있는 숙종과 영조가 후손들에게 항의해야 할 일이다. 왜 우리만 비난해? 선배(?)로서 중종이 엄연히 먼저 저지른 경우가 있다고.
중종의 반전 이미지는 개인사뿐이 아니다.오늘날 연산군은 폭군으로 뒤를 이은 중종은 반정으로 집권하여 순조롭게 나라를 다스린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연산군 때는 못 살았고, 중종 때는 못 살았을까?
연산군 정권의 초중반은 백성들에게 평온한 시기였다.잇따라 재앙이 닥쳤지만 어차피 그 칼끝은 선비들에게로 향했으니. 그러나 연산군 후기로 갈수록 백성의 삶은 고달파졌다. 사치와 유흥에 따른 부담, 파탄에 따른 정치공백의 파문이었다. 폭군이 쫓겨났으니 백성들은 이제 다시 살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중종조의 백성들은 아직 힘겹게 살고 있었다.공신의 지나친 확대로 재정은 궁핍해지고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왕이 정치 전반을 장악하지 못한 탓에 관직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졌다(p45). 중종이 유능한 군주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지어고변사건,익명서사건이끊임없이발생하고대형옥사에퍼진것도여러번있었다(p193).옥사에희생당한사람이연산때를 능가할정도였다니,이래서야연산군을폐위시킨 보람이있을까?
태종 때부터 성종, 연산군 중기까지 확립된 태평성대는 여기까지였다.왕권은 약화되고 국난이 거듭되었다. 그 뒤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 시기를 능가하는 태평성대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덧칠
글에서 이정영이라는 인물이 탄핵을 당했다고 약간 언급돼 있을 뿐이다.이름만 언급됐을 뿐이지만 이조년이라는 이름은 친숙했다. 다정가 이정영 선생님이 아닌가. ‘이화를 넘어’로 시작하는 시조 다정가를 쓰신 분 이분이 중종대 사람이셨구나
![중종 [역사만화] 박시백의 9](https://blog.kakaocdn.net/dn/cVWiAw/btrt1KNUmTr/MSs5AHVGbPFpzZt8J0KjG0/img.jpg)
대장금에서 중종의 이미지는 맛있다고 감탄하는 너무 간 임금으로 보인다.
이조년 외에도 중종 대에는 유명 인사가 많다.서경덕과 황진이, 그리고 대장금 등. 정치적으로 비중이 없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잘 아는 유명인사다.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이들이 중종보다 화제성이 더 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