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잘 안 봐. 감정적인 동요가 좋아지는 편이라 살펴보면 감정 소모가 많아 피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 회를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런데 요즘 남편과 토요일 저녁 맥주를 마시며 재미있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두세 편씩 보는 재미에 빠져 있다. 최근 본 드라마 중 보는 내내 두 사람이 함께 극찬한 드라마가 바로 <나의 해방일지>다.
- 포스팅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처 – 나의 해방일자 | 프로그램 | JTBC (joins.com)
드라마 리뷰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마지막 회를 보고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인물의 헤어스타일 변화였다. 마지막 무렵 갔을 때 ‘몇 년 후’라는 시간 공백이 생겼는데 누군가는 남들처럼 변해 있었지만 또 누군가는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다.
헤어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는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나도 뭔가 변화를 주고 싶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머리를 자르는 것이니까. 드라마에서 시간적 흐름을 강조하기 위해 분명 스타일의 변화를 주려고 했을 텐데 변화가 없는 인물에게는 심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그냥 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보기로 했다.
염미정을 보자마자 이제 서울 여자가 됐네라고 했다.염미정이 하는 대사 하나하나를 보면 결코 침착하고 온화한 성격이 아님을 알 수 있지만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고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긴 머리로 위장해 약자인 척 순종적인 척 살아간다.하지만 단발머리 염미정은 내면의 강인함을 감추지 않는다. 구자경 앞에서도, 거미 전 남자친구 앞에서도, 해방클럽 멤버들, 직장 동료들 앞에서도 이제는 그녀의 존재감이 드러난다.사실 염미정을 보면서 정말 아쉬웠다. 착실하게 살다가 돈을 떼먹는 전 남자친구에게 조폭 현 남자친구라니. 왜 염미정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생길까 했는데 마지막 회까지 살펴보니 알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염미정의 삶이 좌우됐지만 구자경만큼은 염미정의 선택이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염미정이 충분히 견디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그녀의 짧아진 헤어스타일 끝에서 흩어지는 듯했다.
구자경은 더욱 정돈되고 세련돼 보이지만 그의 들개 같은 성격을 알면 서울의 구자경은 마치 우리 안에 갇힌 야생동물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울의 구자경은 늘 추위에 떨고 있다. 겨울이라 그런지 몰라도 산포로 내려온 구자경은 전혀 떨리지 않는다. 구자경이 떨고 있는 것은 자신을 길들이고 있는 조련사 같은 신회장, 감옥 같은 도시, 잘 다듬어진 헤어스타일일지도 모른다.구자경은 염미정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이다. 처음 살포하러 왔을 때도. 그리고 서울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도.염미정이 출퇴근하며 보는 교회 메시지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겠죠.은 염미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염미정을 통해 구자경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염미정이 있는 한 그의 하루에 항상 좋은 일이 있었다.
염기정은 헤어스타일에 가장 많은 변화를 주는 인물이다. 모두들 염기정이 헤어스타일을 바꾸면 그녀의 신변에 큰 변화가 있음을 알게 된다. 파마가 잘못됐다며 아침부터 장황하게 날뛰는 염기정이 부엌 가위로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모습은 그녀의 내면에 큰 파도가 일고 있음을 알려준다. 남자친구의 가족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기정은 머리를 스스로 자름으로써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포장을 벗고 이제는 자신의 선택대로, 자신의 감정대로 가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을까.
아버지는 무뚝하고 권위적이며 융통성 없는 시골의 옛 남자다. 염창희의 한마디에 금방이라도 상을 뒤집어 버릴 듯 눈이 휘둥그래지는 아버지의 헤어스타일은 그의 강한 성격만큼 자유롭게 뻗어 나간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많이 늙어버렸다.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떠나버린 아버지는 그의 헤어스타일만큼 한없이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 사자의 갈기 같았던 풍성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자신의 연약함을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드러내는 모습은 우리가 끝까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우리 아버지들의 현실 같다.
그리고 제가 이 포스팅을 하게 만든 염창희, 지현, 조태훈. 이들은 첫 등장부터 마지막 회까지 조금 흐트러지거나 자연스러워지는 범위 내에서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염창희는 늘 변화를 원한다. 현실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만 왠지 늘 답보 상태다. 차를 사려고 할 때도, 괜찮은 자리의 편의점이 나왔을 때도, 연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도, 퇴근했을 때도. 염창희는 변화 앞에서 늘 무언가에 의해 가로막힌다. 자신이 고비였다는 그의 대사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마지막 회를 보면 알게 된다. 염찬희의 인생에 벽이 사라지는 순간이 오고 있다는 걸. 2년 뒤 염창희가 어떤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현아는 과거와 연결된 사람이다. 서울에 나가 있으면서도 산포 친구들과 인연을 맺는다. 전 남자친구의 간병을 하다가 현 남자친구의 분노를 사거나 헤어진 염창희의 편의점에 간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항상 과거에 남기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은 항상 따뜻하고 아프다.
조태훈은 이혼으로 인해 상처받은 딸, 그런 자신을 위한 언니들의 희생에 대해 늘 죄책감을 갖고 있다. 이런 거친 마음의 짐은 염기정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를 방해한다. 오랜만에 만난 해방클럽 멤버들 앞에서도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고.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짐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는 것 같다. 언제든 함께 짊어질 각오가 돼 있는 염기성이 있음에도 그에게는 그마저도 무게로 느껴지는 것 같다. 버스에서 잘못 잠근 코트 단추를 다시 잘못 끼운 그를 보며 염기정과의 미래가 그리 밝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잘못 채워졌지만 행복하고 따뜻해 끝까지 단추와 단추 구멍이 대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영원히 변하지 않을 엄마의 헤어스타일.
넷플릭스를 통해 꽤 자극적인 드라마를 많이 봤다. 긴장되고 설레고 놀랄 때마다 이런 게 정말 즐겁다고 느꼈는데 오랜만에 내 삶의 속도와 비슷하게 흐르는 이야기를 만나니 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하고 편안했다. 다 봐서 아쉽게도 다행이야. 이제 다른 재미를 찾아야겠다.
아쉬우니까 한 장 더.
당시에는 심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정말 행복했던 장면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 빛나고 감사하는 순간을 살면서도 우리는 쉽게 그늘로 시선을 돌린다. 지금의 소중함, 그리고 가족의 소중함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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